'그건 진짜 기획이 아니다'가 매번 틀린 이유
도구를 본질로 착각하면 저항하게 되고, 매번 틀린다
저항은 항상 같은 얼굴로 온다
새로운 도구가 등장할 때마다 어김없이 나오는 말이 있다. "그건 진짜가 아니다." 기획 도구가 바뀌고, 산출물 형식이 달라지고, 작업 방식이 뒤집힐 때마다 이 저항은 반복된다. 나는 이 패턴이 개발 영역에서 이미 네 번 반복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네 번 모두, 저항한 쪽이 틀렸다.
개발에서 네 번 반복된 패턴
어셈블리 언어 시대에 C 언어가 등장했을 때, 많은 개발자들이 말했다. "그건 진짜 프로그래밍이 아니다. 기계어를 직접 다뤄야 진짜지." C에서 C++로 넘어갈 때도 같은 말이 나왔다. 객체지향은 진짜 프로그래밍을 추상화로 가린다는 비판이었다. 이후 Java와 Python이 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메모리를 직접 관리하지 않으면 진짜 개발자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그리고 지금, AI 코드 어시스턴트가 코드를 생성하자 또 같은 말이 나오고 있다. "그건 진짜 코딩이 아니다."
이러한 저항의 공통점은 하나다. 도구를 본질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어셈블리를 쓰는 행위 자체가 프로그래밍의 본질이 아니었다. 본질은 문제를 정의하고, 논리를 설계하고, 그것을 기계가 실행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는 것이었다. 도구가 바뀌어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저항한 사람들은 도구가 바뀌면 본질도 사라진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도구가 바뀔수록 본질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물론 저항이 완전히 무의미했던 건 아니다. 추상화 수준이 올라갈수록 잃는 것도 있었다. 어셈블리를 모르면 특정 최적화를 이해하기 어렵고, 메모리 관리를 모르면 특정 버그를 추적하기 힘들다. 다만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의 근거가 아니라, 트레이드오프의 문제였다. 저항한 사람들은 트레이드오프를 부정으로 표현했고, 그 부정이 매번 틀렸다.
PM 영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
지금 PM 영역에서 동일한 저항이 벌어지고 있다. AI가 PRD 초안을 쓰고, 사용자 인터뷰 요약을 정리하고, 경쟁사 분석 리포트를 생성하자 이런 말이 나온다. "그건 진짜 기획이 아니다. 직접 써봐야 생각이 정리되는 거다." 기획서를 손으로 쓰는 행위 자체가 기획의 본질이라는 논리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어셈블리 개발자들의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이러한 저항이 나오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 기획서를 직접 쓰는 과정에서 생각이 구체화되는 경험은 실제로 존재한다. 문장을 다듬으면서 논리의 허점을 발견하고, 구조를 잡으면서 우선순위가 명확해지는 과정이 있다. 그 경험이 소중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건너뛰는 것처럼 보이는 도구에 저항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경험의 핵심이 "직접 타이핑하는 행위"가 아니라 "논리를 검증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도구가 바뀌어도 그 과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저항의 일부는 불안에서 온다. 도구가 내 역할을 대체할 수 있다면,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의미를 잃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이다. 나도 그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 그 불안을 "진짜가 아니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순간, 저항은 논리가 아니라 감정이 된다. 그리고 감정으로 하는 저항은 매번 틀렸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기획에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면 저항의 오류가 보인다. 변하는 것은 도구와 산출물 형식이다. 기획서를 Word로 쓰던 것이 Notion으로 바뀌고, 이제 AI가 초안을 생성한다. 와이어프레임을 손으로 그리던 것이 Figma로 바뀌고, 이제 AI가 프로토타입을 만든다. 이것들은 모두 도구의 변화다. 변하지 않는 것은 문제 정의와 우선순위 판단이다.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 여러 선택지 중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어떤 도구가 등장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도구를 본질로 착각하면 저항하게 되고, 본질을 도구로 착각하면 대체된다. 기획서를 잘 쓰는 능력이 기획의 본질이라고 믿으면, AI가 기획서를 쓰는 순간 자신이 대체된다고 느낀다. 반면 문제를 정의하고 우선순위를 판단하는 능력이 본질이라고 알고 있으면, AI는 그 능력을 더 빠르게 실행하는 도구가 된다. 같은 상황을 두고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러한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저항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무엇을 갈고닦아야 하는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도구가 본질이라고 믿으면 새 도구를 익히는 데 에너지를 쏟는다. 본질이 문제 정의와 우선순위 판단이라고 알면, 그 판단력을 키우는 데 에너지를 쏟는다. 전자는 도구가 바뀔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고, 후자는 도구가 바뀔수록 더 강해진다.
저항이 틀린 이유는 단 하나다
결국 "그건 진짜 기획이 아니다"가 매번 틀린 이유는 단 하나다. 도구를 본질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어셈블리 개발자들이 C를 거부했을 때도, 지금 PM들이 AI 기획 도구를 거부할 때도, 저항의 구조는 동일하다. 도구가 바뀌면 본질도 사라진다는 믿음, 그 믿음이 틀렸다. 본질은 도구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는다. 어쩌면 도구가 바뀌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본질을 붙잡고 있는 사람과 도구를 붙잡고 있는 사람의 차이는 더 선명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