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잘하는 일에서 경쟁하지 마라
이길 수 없는 경쟁을 인식하고, 경쟁 영역을 전환하라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AI가 문서를 쓴다. 코드를 짠다. 데이터를 분석하고 리포트를 만든다. 이 사실 앞에서 많은 PM들이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택한다. "AI가 내 일을 빼앗겠다"며 불안해하거나, "그래도 사람이 더 잘 쓴다"며 애써 무시하거나. 나는 두 반응 모두 문제의 본질을 비껴간다고 생각한다. 진짜 질문은 "AI가 내 일을 빼앗느냐"가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경기장에서 싸우고 있느냐"다.
AI가 잘하는 영역에서 사람이 이길 확률은 0%에 가깝다. 구구단을 99단까지 외운 사람이 9999단을 즉각 계산하는 기계와 암산 대결을 벌이는 격이다. 속도, 정확도, 일관성, 처리량 모두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PM들이 "더 좋은 기획서를 쓰겠다", "더 정교한 분석을 하겠다"는 방향으로 역량을 쌓으려 한다. 이길 수 없는 경쟁에 자원을 쏟아붓는 것이다.
AI가 못 하는 영역이 PM의 진짜 경기장이다
AI는 주어진 문제를 잘 푼다. 다만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는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이해관계자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회의실에서 공통된 문제 정의를 끌어내는 일, 데이터가 말해주지 않는 맥락을 읽어내는 일,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들 중 지금 해야 할 것을 고르는 일. 이것들은 AI가 대신할 수 없다. 정확히는, AI에게 이 일을 시키려면 먼저 사람이 그 판단을 내려야 한다.
문제정의가 틀리면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도 전부 틀린다. 잘못된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변은 쓸모가 없다. 이해관계자 조율이 안 된 상태에서 나온 기획서는 아무리 잘 써도 실행되지 않는다. 우선순위 판단이 흐릿한 팀은 AI가 생산성을 10배 높여줘도 엉뚱한 방향으로 10배 빠르게 달릴 뿐이다. 결국 PM의 가치는 AI가 풀어야 할 문제를 정확히 정의하는 데 있다. 문서를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이 경기장에서는 AI가 경쟁자가 아니라 도구가 된다. 문제를 정의하면 AI가 문서를 쓴다. 우선순위를 결정하면 AI가 분석을 돌린다. 맥락을 읽어내면 AI가 그것을 구조화한다. PM이 판단의 주체로 서는 순간, AI는 위협이 아니라 레버리지가 된다.
기본기 없이는 경기장을 바꿀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가 생긴다. "AI가 문서를 써주니까 문서 작성 능력은 몰라도 된다"는 생각이다. 나는 이것이 위험한 착각이라고 본다. AI가 못 하는 영역에서 싸우려면, 그 영역의 기본기가 먼저 단단해야 한다. 문제정의를 잘 하려면 문제를 글로 써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 이해관계자를 조율하려면 그들의 언어를 이해해야 하고, 그 언어는 수많은 문서와 회의를 통해 체득된다.
기본기는 AI에게 위임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좋은 프롬프트를 쓰려면 좋은 질문을 만드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AI가 생성한 결과물의 품질을 판단하려면 그 영역의 기준을 알아야 한다. 기본기가 없는 사람은 AI가 틀린 답을 내놓아도 알아채지 못한다. 결국 AI를 잘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의 차이는 AI 사용 능력이 아니라, AI에게 무엇을 시킬지 아는 능력에서 갈린다.
다만 기본기를 쌓는 목적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기본기 자체가 경쟁력이었다. 문서를 잘 쓰면 좋은 PM이었다. 지금은 기본기가 경쟁 영역 전환의 발판이다. 문서를 쓸 줄 알아야 AI에게 문서를 맡길 수 있고, 그 시간에 AI가 못 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기본기의 용도가 바뀐 것이지, 기본기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경쟁 영역을 의식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 전환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AI가 잘하는 일을 AI에게 넘기고, 그 공백을 AI가 못 하는 일로 채우는 것.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불편하다. 문서를 직접 쓰는 것이 익숙한 사람에게 "AI에게 맡기고 당신은 문제정의에 집중하라"는 말은 추상적으로 들린다. 문제정의가 구체적인 산출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경쟁 영역 전환을 습관의 문제로 접근한다. 회의 전에 "이 회의에서 내가 정의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를 먼저 쓴다. 기획서를 쓰기 전에 "이 기획서가 답해야 할 질문이 무엇인가"를 먼저 정리한다. AI에게 초안을 맡기기 전에 "내가 AI에게 전달해야 할 맥락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이 습관들이 쌓이면, 자연히 AI가 못 하는 영역에서 시간을 쓰게 된다. 결국 경쟁 영역 전환은 거창한 전략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선택들이 만들어내는 방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