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aS가 끝나는 자리에 무엇이 들어서는가
세 방향에서 들어오는 압박, GUI가 깔고 있던 전제, 그리고 다시 그어야 할 좌표.
"SaaS는 끝났다"는 말이 흔해졌다. 한 번쯤 들었거나 직접 말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도발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발이 아니라, 데이터 산업의 구조 변화에서 출발한 결론이다. 그 변화의 깊이를 보지 않으면 이 선언은 그냥 헤드라인으로 흘러간다.
최근 frontier lab 8곳 중 7곳과 거래한다는 한 데이터 회사 CEO의 인터뷰를 봤다. 그가 던진 말 중 가장 무거웠던 한 줄이 "SaaS는 끝났다, 완전히 끝났다"였다. 같은 자리에서 그는 그 결론에 도달하게 된 세 갈래 압박을 짚었다. 세 갈래가 동시에 들어오는 시점이 지금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제품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이 선언의 무게는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 끝났다는 말이 SaaS 모델 자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SaaS가 전제로 깔고 있던 무언가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전제가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그 자리에 들어서는지를 본다.
데이터의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SaaS의 종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모델이 학습하는 데이터가 어떻게 바뀌어왔는지를 봐야 한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데이터의 변화를 세 축으로 정리했다. 단순한 데이터에서 복잡한 데이터로, 시험 통과에서 실제 업무로, 챗봇에서 에이전트로. 세 축은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몇 년 전만 해도 모델 학습용 데이터는 "파이썬으로 숫자를 정렬하는 코드를 짜라" 수준이었다. 지금은 "닥터와 환자를 연결하는 B2B 마켓플레이스를 안드로이드와 iOS와 웹으로 동시에 만들어라" 수준의 과제가 데이터로 들어간다. 차이는 "몇 줄 더 길다"가 아니다. 데이터를 생성할 수 있는 사람의 풀 자체가 통째로 줄어든다는 뜻이다. 단순 라벨링은 누구나 할 수 있었지만, 이런 과제는 도메인 전문가만 만들어낼 수 있다.
두 번째 축은 데이터가 시험을 푸는 모델에서 일을 하는 모델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변호사 시험을 통과하는 모델과 실제로 컴플라이언스 변호사 일을 해내는 모델은 다른 데이터로 학습된다. 세 번째 축은 챗봇에서 에이전트로의 전환이다. 챗봇은 입력과 출력을 짝지어 학습시키지만, 에이전트는 작은 환경 안에서 시도하고 검증받는 강화학습 구조로 학습된다. 그 환경 자체를 만드는 일이 새로운 데이터 산업이 됐다.
이러한 변화의 누적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하다. 모델이 점점 더 인간이 일하는 자리에 가까워지고 있다. 인간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클릭하며 도구들 사이를 오가는 그 자리. 모델이 그 자리에 도달하는 순간, 그 자리를 위해 만들어진 도구들의 운명이 바뀐다.
첫 번째 압박, 빌드 비용이 무너졌다
SaaS의 핵심 명분은 "이거 직접 만들기 너무 복잡하니까 사서 쓴다"였다. 고객지원 챗봇을 직접 만들려면 NLP 박사를 뽑고, 데이터를 6개월 모으고, 어색하게 작동하는 모델을 들고 운영하며 갈아야 했다. 회사 본업이 그게 아니라면 누구도 그 비용을 감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SaaS가 의미가 있었다.
이 명분이 LLM 위에서 사라지고 있다. 같은 챗봇을 한 사람이 며칠 만에 붙인다. 한 줄짜리 함수 호출이 6개월짜리 NLP 프로젝트를 대체한다. "직접 만든다" 옵션의 비용 곡선이 무너졌다. 사야 할 명분이 약해진 만큼 만들어 쓰는 비율이 늘어난다.
필자 본인의 작업 환경에서도 이 흐름은 명확하게 관찰된다. 한 해 전에 비해 새로 결제한 SaaS 수가 거의 늘지 않았다. 늘어난 자리는 자체 스킬, 자체 에이전트, 자체 워크플로우가 차지했다. IT 업계의 특수한 패턴이라고 보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비전공 직군에서도 ChatGPT 위에 자기 워크플로우를 얹어 쓰는 사람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무엇을 만들 수 있느냐의 정의 자체가 바뀌고 있다.
물론 이 압박이 모든 SaaS를 같은 속도로 누르지는 않는다. 한 사람이 며칠 만에 만들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이 갈린다. 도메인 깊이가 깊은 SaaS는 이 압박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그러나 단순한 워크플로우를 묶어 파는 SaaS는 압박이 빠르게 들어온다. 첫 번째 압박은 쉬운 것부터 들어오는 압박이다.
두 번째 압박, 모델 자체가 앱을 흡수한다
두 번째 압박은 더 깊다. foundation model이 에이전트가 되면서 그동안 SaaS가 차지하고 있던 중간 레이어를 직접 흡수하기 시작했다. 사용자가 모델에게 자연어로 작업을 맡기면, 모델이 도구 호출로 데이터베이스를 직접 업데이트한다. SaaS가 차지하던 자리가 사라진다.
한 가지 예가 같은 인터뷰에 등장했다. "내 의료보험 수혜자 정보에 새로 태어난 딸을 추가해 줘"라는 작업을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는 HR SaaS의 GUI에 들어가서 메뉴를 찾고, 양식을 채우고, 제출했다. 모델이 충분히 에이전트적이고 조직 데이터베이스에 연결되어 있다면, 그 사이에 SaaS GUI가 있을 이유가 없다. 사용자에서 모델로, 모델에서 DB로 직선이 그어진다.
이 압박은 PM의 일을 직접적으로 흔든다. 그동안 시간을 들여 설계하던 워크플로우들이 상당수 모델의 tool use로 흡수된다. "단계 A 다음 단계 B로 가도록 화면을 설계한다"는 작업이 "이 작업을 위해 호출 가능한 도구 N개를 모델에 노출시킨다"로 바뀐다. 만들어야 하는 것의 종류가 달라진다.
물론 모든 워크플로우가 이렇게 흡수되는 것은 아니다. 모델이 충분한 맥락을 갖지 못한 영역, 검증이 까다로운 영역, 도메인 규제가 강한 영역은 여전히 사람이 설계한 워크플로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비율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PM의 시간이 어디로 흘러야 하는지의 좌표가 바뀐다.
세 번째 압박, GUI는 인간을 위해 설계됐다
세 번째 압박이 가장 깊은 자리에서 들어온다. SaaS의 본질은 GUI다. 메뉴와 버튼과 양식과 표. 이 모든 것이 한 가지 전제 위에 서 있다. 인간이 키보드와 마우스로 클릭한다는 전제다. SaaS는 그 인간을 더 효율적으로 일하게 해주는 도구로 설계됐다.
이 전제가 무너지고 있다. 음성 입력이 받아쓰기 수준에서 ambient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다. 멀티모달 모델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동시에 처리한다. 한 줄로 말하고 결과를 받는 인터페이스가 자연스러워지면 클릭은 줄어든다. 필자도 이미 이메일을 거의 타이핑하지 않는다. 받아쓰기로 말하면 모델이 다듬어 보낸다. 클릭이 사라지는 자리부터 GUI의 명분이 사라진다.
GUI는 하나의 인터페이스 모드였다. 가장 효율적인 모드여서가 아니라, 그 시대 인간의 입력 도구가 키보드와 마우스였기 때문에 그렇게 정착됐다. 입력 도구가 바뀌면 인터페이스도 바뀐다. 변화가 누적되면 SaaS의 본질적 형태가 흔들린다. SaaS의 죽음이 아니라, SaaS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의 디폴트가 무너지는 것이다.
다만 이 변화가 단번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같은 사람도 어떤 작업은 음성으로, 어떤 작업은 클릭으로 한다. 한 동안 두 인터페이스가 공존한다. 그러나 디폴트가 바뀌는 순간, 새로 만들어지는 도구는 음성과 멀티모달을 디폴트로 깔고 GUI를 옵션으로 둔다. 신규 자리에서부터 변화가 들어온다.
그러면 무엇이 들어서는가
세 갈래 압박을 함께 놓고 보면 SaaS의 종말이라는 말의 정확한 무게가 보인다. SaaS 모델 자체가 죽는 게 아니다. SaaS가 전제로 깔고 있던 세 가지가 동시에 약해지고 있다. 빌드 비용이 높다는 전제, 모델이 중간 레이어를 필요로 한다는 전제, 인간이 GUI로 작업한다는 전제. 셋이 함께 약해지면 SaaS의 자리가 비좁아진다.
살아남는 SaaS는 두 종류로 보인다. 첫째는 모델이 흡수하지 못하는 도메인 깊이를 가진 SaaS다. 학습 데이터에 충분히 들어 있지 않고 회사별 고유 데이터가 핵심 가치인 영역, 의료와 법률과 금융의 깊은 워크플로우, 산업별 규제 영역이 그 자리다. 이런 영역은 도메인 데이터가 모델보다 강한 moat가 된다. 둘째는 인간 인터페이스가 아니라 모델 인터페이스로 다시 설계된 SaaS다. 사람이 클릭하는 것을 가정하지 않고 모델이 호출하는 것을 가정하는 도구다. MCP 서버, 에이전트 친화적 API, 자체 검증 가능한 워크플로우 객체가 그 형태다.
새로 만들어지는 자리도 두 종류다. 모델이 흡수하지 못한 도메인을 빠르게 좁혀 들어가는 vertical SaaS와, 모델 인터페이스로 처음부터 설계된 agent-native 도구. 둘은 만들어지는 방식과 팔리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 같은 SaaS라는 단어로 묶이지 않는 것에 가깝다. 어느 쪽이든 공통점은 "인간이 클릭한다"는 전제를 디폴트에서 빼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다시 그어야 할 좌표
SaaS의 종말이라는 말의 진짜 무게는 SaaS의 죽음이 아니다. SaaS가 깔고 있던 전제의 죽음이다. 빌드가 어렵다는 전제, 중간 레이어가 필요하다는 전제, 인간이 클릭한다는 전제. 셋이 같이 약해지는 시점이 지금이고, 그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도구가 다음 사이클의 SaaS를 정의한다.
결국 도구를 만드는 사람이 다시 설계해야 하는 것은 도구가 아니라 도구가 깔고 있던 전제다. 모델이 어디까지 흡수했는지, 인간이 클릭하는 자리가 어디로 줄어들었는지, 도메인 데이터가 어디서 모델보다 강한지. 이 좌표 위에서 다시 그어야 한다. SaaS가 끝났다는 말은 그 좌표를 다시 보라는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