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메인을 모르면 질문조차 못 한다
AI가 답을 주는 시대, PM의 기본기는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
AI가 답을 주는 시대, 질문은 누가 만드는가
AI가 코드를 짜고, 기획서를 쓰고, 분석 리포트를 뽑아내는 시대가 됐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변화를 보며 "이제 실행은 AI가 한다, 사람은 방향만 잡으면 된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 말이 전제하는 것이 있다. 방향을 잡으려면, 먼저 올바른 질문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질문은 도메인을 모르면 나오지 않는다.
나는 PM으로 일하면서 이 사실을 꽤 늦게 깨달았다. 처음에는 프레임워크를 잘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용자 인터뷰 가이드, 문제 정의 템플릿, OKR 설정 방법론. 이런 것들을 익히면 좋은 질문이 나올 거라고 믿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도메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프레임워크를 쓰면, 형식은 갖춰지지만 내용이 비어 있는 질문이 나온다.
기본기 없이는 질문 자체가 불가능하다
PM의 기본기를 말할 때 흔히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나 데이터 분석 스킬을 꼽는다. 틀린 건 아니지만, 그것들은 도구다. 도구를 쓰기 전에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 도메인 지식, 사용자 이해, 비즈니스 맥락.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어떤 도구를 써도 문제를 제대로 정의할 수 없다.
건축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르다. 건축가가 구조역학을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 아름다운 스케치를 그릴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건물이 실제로 서 있을 수 있는지, 어디에 하중이 집중되는지, 어떤 재료를 써야 하는지 판단하지 못한다. 결국 설계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PM도 마찬가지다. 서비스가 작동하는 도메인을 모르면, 사용자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불편을 겪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파악하지 못하면 질문을 만들 수 없다. 질문이 없으면 문제 정의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AI는 오히려 문제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AI는 질문을 받으면 답을 준다. 좋은 질문에는 좋은 답을, 나쁜 질문에는 그럴듯하지만 쓸모없는 답을 준다. 도메인을 모르는 PM이 AI를 쓰면, 나쁜 질문을 빠르게 많이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속도는 빨라지지만 방향은 더 빠르게 틀어진다.
데모와 실제 서비스 사이의 간극
AI 도구들은 데모가 인상적이다. 프롬프트 몇 줄로 앱 화면이 나오고, 사용자 시나리오가 생성되고, 경쟁사 분석 리포트가 완성된다. 처음 보면 "이제 기획은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물을 실제 서비스에 적용하려는 순간, 간극이 보이기 시작한다.
데모에서 나온 사용자 시나리오는 일반적이다. 특정 도메인의 사용자가 실제로 겪는 마찰, 그 마찰이 발생하는 구체적인 맥락, 그 맥락을 만들어내는 비즈니스 구조. 이런 것들은 AI가 생성한 시나리오에 없다. 있을 수가 없다. AI는 학습 데이터에서 패턴을 뽑아내는데, 특정 서비스의 특정 사용자가 겪는 특수한 문제는 그 데이터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은 도메인을 아는 사람의 판단이다.
물론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완전히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다. 초안으로서, 검토의 출발점으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 다만 그 초안을 보고 "이게 맞는 방향인가, 빠진 게 무엇인가, 이 서비스의 사용자에게 실제로 적용 가능한가"를 판단하려면 도메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판단 능력이 없으면 초안은 그냥 초안으로 끝난다.
도메인 전문성 × AI 기술, 곱셈이지 덧셈이 아니다
AI 기술을 잘 쓰는 것과 도메인을 아는 것은 서로 대체 관계가 아니다. 곱셈 관계다. 둘 중 하나가 0이면 결과도 0이다. AI 기술만 있고 도메인이 없으면, 빠르게 틀린 방향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된다. 도메인은 있지만 AI 기술이 없으면, 느리게 맞는 방향으로 걷는 사람이 된다. 지금 시대에 필요한 것은 빠르게 맞는 방향으로 달리는 사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AI 시대에 PM의 기본기는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 예전에는 도메인을 모르면 실행 속도가 느려졌다. 지금은 도메인을 모르면 실행 자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빠르게 진행된다. 피해 규모가 달라진다. 동시에 도메인을 아는 사람이 AI를 잘 쓰면,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속도로 올바른 방향을 검증하고 실행할 수 있다. 격차가 벌어지는 구조다.
나는 이것을 직접 경험했다. 도메인을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AI를 쓸 때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쓸 때의 결과물 품질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도메인을 알면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에서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는지 즉시 보인다. 어디를 수정해야 하는지, 어떤 질문을 추가해야 하는지도 보인다. 도메인을 모르면 그 결과물이 좋은지 나쁜지조차 판단하지 못한다.
질문을 만드는 사람이 희소해진다
AI가 답을 주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질문을 만드는 능력이 더 희소해진다. 답을 생성하는 비용이 거의 0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이제 병목은 질문의 품질에 있다. 좋은 질문 하나가 수십 개의 나쁜 답보다 가치 있다. 그리고 좋은 질문은 도메인을 알고, 사용자를 이해하고, 비즈니스 맥락을 파악한 사람에게서 나온다.
결국 PM의 기본기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그 문제가 왜 중요한지, 지금 이 서비스의 사용자에게 실제로 의미 있는 변화가 무엇인지. 이것을 판단하는 능력은 도메인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도메인을 모르면 질문조차 못 한다. 그리고 질문을 못 하면, 아무리 좋은 AI 도구가 있어도 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