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
AI가 실행을 가져간 뒤, PM의 본질만 남았다. 그런데 시장은 아직 거기 없다.
채용 공고를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어떤 역량을 원하는지, 어떤 도구를 쓰는지, 어떤 방법론을 전제하는지. 최근 PM/PO 포지션의 JD를 훑다 보면 이상한 감각이 든다. "제품 정책 수립", "그로스 전략", "A/B 테스트 설계",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 문장들이 전제하는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글은 답이 아니라 고민이다. AI가 PM의 실행 영역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는 과도기에, 문제 정의라는 본질만 남았을 때 PM이라는 직무는 어떻게 재정의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그 재정의를 체감하는 개인과, 아직 기존 프레임에 머물러 있는 조직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고 있는가. 6년 넘게 제품 조직에서 일해온 사람의, 아직 답이 나지 않은 질문이다.
린의 전제가 무너졌다
PM이 지난 10년간 체화해온 방법론의 대부분은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었다. 실험 비용이 비싸다는 것이다. MVP는 "다 만들면 비싸니까 최소한으로 만들어서 검증하자"는 논리였고, 린 프로세스는 "실패 비용을 줄이기 위해 빠르게 학습하자"는 프레임이었다. 가설 수립, 우선순위 매트릭스, 임팩트-에포트 분석. 이 도구들은 모두 "자원이 한정되어 있으니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AI가 이 전제를 무너뜨리고 있다.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데 일주일이 걸리던 것이 몇 시간이면 끝난다. 데이터 분석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 프롬프트 한 줄로 해결된다. 사용자 리서치 설계, 정책 초안 작성, 경쟁사 분석까지. 이 모든 것의 실행 비용이 0에 수렴하고 있다. 비용이 0에 수렴하면, "비용을 줄이기 위한 방법론" 자체가 존재 이유를 잃는다.
이것은 방법론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방법론이 서 있던 전제가 소멸했다는 뜻이다. MVP를 만들 필요가 없어진 게 아니라, MVP라는 개념 자체가 전제하던 "만드는 데 비용이 든다"는 명제가 약해진 것이다. 린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린이 해결하려던 문제, 즉 실패 비용의 최소화가 AI에 의해 이미 풀리고 있다는 관찰이다.
실행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는가
PM의 업무를 나열해 보자. 시장 조사, 경쟁사 분석, 사용자 인터뷰 설계, 데이터 분석, 가설 수립, A/B 테스트 설계, PRD 작성, 정책 수립, 그로스 전략, 스테이크홀더 커뮤니케이션, 우선순위 결정, 로드맵 관리. PM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이 목록은 사실상 "실행"의 다른 이름들이다. 이 중에서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하나씩 지워보면, 남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시장 조사와 경쟁사 분석은 AI가 더 빠르고 더 넓게 해낸다. 데이터 분석은 이미 AI의 영역이다. PRD와 정책 초안은 컨텍스트만 넘기면 AI가 작성한다. 그로스 전략도, A/B 테스트 설계도, 실행 레벨에서는 AI가 충분히 해낸다. 남는 것은 하나다. "어떤 문제를 풀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문제 정의다.
문제 정의란 단순히 "이슈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의 구조를 이해하고, 사용자가 말하지 않는 것을 읽어내고, 기술의 가능성과 사업의 제약 조건 사이에서 풀 가치가 있는 문제를 식별하는 능력이다. 도메인 지식, 직관, 판단력의 복합체다. AI가 모든 실행을 대신하더라도,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영역이다.
빨리 만들어도, 문제를 못 찾으면 의미 없다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AI가 PM의 실행 영역을 가져가면서, PM은 오히려 자신의 본질에 더 가까워졌다. PM이라는 직무가 처음 정의됐을 때, 그 핵심은 "어떤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실행 역량은 그 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목적이 아니었다. AI가 수단을 가져갔을 뿐, 목적은 그대로다.
지금 나는 AI 인재들이 모이고 성장하는 것을 돕는 제품을 만들고 있다. 반대편에서는 기업이 AI 인재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 과제다. 예전이라면 린하게 접근했을 것이다. 최소 기능으로 MVP를 만들고, 빠르게 실험하고, 학습 루프를 돌린다. 지금은 딸깍 한 번이면 서비스가 나온다. 만드는 건 문제가 아니다. 빠르게 만들 수 있는 건 당연하고, 학습 속도가 빨라지는 것도 당연하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다. 빨리 만들어도, AI 인재가 실제로 겪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면 의미가 없다. AI 인재를 찾으려는 기업의 실질적인 페인 포인트를 모르면 아무리 매끈한 서비스를 찍어내도 쓸모가 없다. 승패는 "얼마나 빨리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문제를 찾았느냐 못 찾았느냐"에서 갈린다. 실행 비용이 0에 수렴하는 시대에, 실행 속도는 더 이상 경쟁 우위가 아니다. 문제를 정확하게 정의해내는 능력만이 차이를 만든다.
개인은 빠르고, 조직은 느리다
이 변화를 실감하고 나면, 채용 공고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JD에 "제품 정책 수립 경험", "그로스 지표 관리", "린 방법론 이해"가 나열되어 있으면, 그 자체가 시그널이다. 이 조직은 아직 실험 비용이 비싸던 시대의 프레임으로 PM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역량 자체가 무의미해진 것도 있고, 회사가 아직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있다.
이것이 조직의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회사에는 시스템이 있고, 프로세스가 있고,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 6년 넘게 회사를 다녀본 입장에서, 조직이란 것이 한 번에 바뀌기는 극히 어렵다는 걸 안다. 이미 잡혀진 평가 기준, 역할 정의, 채용 파이프라인이 존재한다. AI가 바꿔놓은 현실을 개인이 체감하는 속도와, 조직이 제도적으로 반영하는 속도 사이에는 구조적 시차가 존재한다.
문제는 이 시차가 만들어내는 현실적 결과다. 나는 이미 "문제 정의에 초집중하고, 실행은 AI로 해치우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 이 관점에 맞는 회사, 이 방식을 이해하는 자리를 찾으려고 하면 선택지가 급격히 줄어든다. AI native를 진심으로 지향하는 조직, 문제 정의를 PM의 핵심 역량으로 보는 조직은 아직 소수다. 가고 싶은 회사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현실이다.
이 글은 답을 제시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나도 이 과도기를 관통하는 중이고, 이 직무를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PM의 진화인지, 완전히 새로운 직무의 탄생인지, 지금은 판단하기 이르다. 분명한 것은 실행 비용이 0에 수렴하는 세계에서 실행 역량으로 PM을 정의하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PM의 본질은 문제 정의였고, AI가 나머지를 가져간 지금 그 본질만 남았다.
확실한 것은, 기존의 프레임에 머물러 있는 조직과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AI native를 전제하고, 문제 정의에 리소스를 집중하며, 나머지는 AI로 해결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그런 곳이 아직 많지 않다는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이 조직보다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이 속도 차이가 만들어내는 불편함을, 나는 기회라고 읽고 싶다.